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최씨 (문단 편집) === 입장: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음 === 최씨상계보란 최씨가 소벌도리로부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이어지는지를 표기하는 문서다. 다른 말로는 '최씨선계보(崔氏先系譜) 또는 '선의계 추록(先疑系 追錄)'이라고도 한다. 이 자료는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의 주요 근거로 쓰인다. '최치원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거나 '◇◇ 최씨가 소벌도리 또는 최치원의 00세손'라고 말하는 근거는 모두 최씨상계보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의 [[유리 이사금]]이 소벌도리가 속한 사량부에 최씨 성을 하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해당 내용이 언급된다.], 현재 최씨 인구 중에서는 경주 최씨의 숫자가 가장 많다. 때문에 '최씨는 대부분 소벌도리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최씨상계보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씨상계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 [[파일:20210212_choi.jpg|width=415&height=550]]|| || 최씨상계보-1 || || [[파일:choichoi.jpg|width=415&height=285]]|| || 최씨상계보-2 || 이 자료는 최치원 사후 900년이나 지나서 작성됐고,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소벌도리로부터 30여대 걸친 계보를 일일이 열거해 소벌도리와 각 최씨들을 무리하게 연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최치원의 선대 기록이 사라져 세계를 알 수 없다'(崔致遠 字孤雲 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라고 기록됐다.][* 최씨상계보가 처음 만들어졌던 1877년이나 해당 자료가 문서 형태로 발간된 1937년엔 정보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아서 자료에 대한 [[교차검증]]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대엔 인터넷이 발달하고 대부분의 주요 고전이 번역·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교차검증을 통해 해당 자료의 사실성을 검증·확인할 수 있게 됐다.] 경주 최씨가 대동보를 처음으로 만든 건 1734년 갑인보(甲寅譜)[* 전주 최씨 문열공계의 첫 족보는 1567년에 발간됐고, 문성공계 초성일권은 1686년에 만들어졌다.]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 뒤, 기존에는 어떤 사료나 족보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던 내용이 갑자기 개인의 필사의 형태로 출현했다는 건 최씨상계보의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중국의 학자인 [[량치차오]]는 [[위서]]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해 "그 책이 과거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결코 다른 사람이 인용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면, 열에 아홉은 위서다"라고 말했다.] 최씨상계보가 역사적 사실 또는 각 최씨가 주장하는 세계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사실만 확인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본편의 이미지로 첨부된 '최씨상계보-2'를 보면 전주 최씨 문열공계 시조 최순작은 소벌도리의 27세손이며[* '최씨상계보-2'에선 순(純)이라고만 표기가 됐다.], 최치원의 둘째 아들인 도함(道含)의 손자라고 표기되어 있다.[* 최치원-최도함-최첨로-최순작] 하지만 이는 문열공계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다. 문열공계 족보에서는 "우리 집안은 소벌도리의 후손이지만 선대의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증이 가능한 최순작부터 시조로 삼는다"라고 되어 있다, 또 '최씨상계보-2'에서는 최순작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최씨상계보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최온은 소벌도리로부터 28세손, 최치원으로부터 4세손에 해당한다.] 즉 최치원의 손자에서 전주 최씨(문열공계)가 갈라져 나왔고, 문열공계 시조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 시조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주 최씨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해주 최씨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현대의 해주최씨대종회는 소벌도리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긴하나 최치원의 후손이 아닌 최치원 이전 선계인 '최계양성'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이어 최온의 둘째 아들은 최청(崔淸)이며, 그 손자가 탐진 최씨의 시조 [[최사전]](崔思全)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허나 해주최씨대종회에 의하면 최온의 아들론 최충 한명 밖에 없으며 아직 다른 형제분은 기록이 된 문헌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20년대 최사전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 탐진 최씨가 해주 최씨로부터 분적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정됐다. 아울러 최치원의 사촌인 [[최승우]]의 아들이 동주 최씨 시조 최준옹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동주 최씨에서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최순작의 둘째 아들 공(空)[* 실제 전주 최씨 문열공계 족보에선 공(崆)으로 표기된다.]의 손자가 전주 최씨 사도공계의 시조인 최균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최씨상계보에 나오는 내용은 대체로 그 진위를 의심케하는 기록들이다. 최씨상계보의 다른 이름인 선의계 추록이라는 용어도 '윗세대(先)의 의심스러운 계보(疑系)에 대해 추측하여 기록한다(追錄)'는 뜻이다. 명칭 자체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최씨상계보는 역사적 진실과 정통성 등을 외면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오히려 이런 문서가 유행하는 현상은 자신의 성씨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거족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동리]]의 소설 [[화랑의 후예]] 중 "아, 이럴 수가……. 온, 내 조상이 대체 신라적 화랑이구랴!"라는 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실제 한국의 고대사가 최씨상계보의 내용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할 일이다.[* 대표적으로 [[청주 한씨]] 족보를 거론할 수 있다. 청주 한씨는 [[기자(중국)|기자(箕子)]]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족보엔 무려 [[황제(중국 신화)|황제(黃帝]])로부터 기자로 이어져 [[마한|마한(馬韓)]]까지 계려오는 계보가 수록됐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선 이 계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배경에 따라 전주최씨중앙화수회[* 1958년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사도공계가 뜻을 모아 결성한 종친회 조직이다.]에선 1986년 발행한 '전주최씨화수회보' 제17호를 통해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정공파(文貞公波)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전해오고 있으나 초씨원류대계(崔氏源流大系)에서 말하는 경주최씨상계보는 불과 100년 전후의 것이며, 이경도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이라는 사람은 어느 연대인지도 알 수 없다. 그분이 개인 취미로 성씨를 수집하여 미완된 제성(諸姓) 사보(私譜) 자료 중 경주최씨상계보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과신할 바가 못 된다. > >또 오문(吾門)의 상계를 최치원의 둘째 손자 첨로의 계통으로 연계시켜 놓은 점은 용납할 수 없다. (최씨상계보)보다 수백년 앞서 족보를 편찬해 온 오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역사적 차이가 허다하다. 만일 문제의 계보를 인정한다면 오문의 족보 600년사는 도외시되는 중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문충공계 일부 후손들이 1995년 합동으로 발간한 '전주최씨연원지(全州崔氏淵源誌)'라는 책[* 전주 최씨 대동 광주·전남 화수회(全州 崔氏 大同 光州·全南 花樹會)에서 발간했다.]에서는 최씨상계보를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 참고용'이라고만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선의계 추록은 '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로써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877년[* 고종 14년]에 함경남도 이원군 동서면 효우리 강성우(姜聖佑)씨 집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성우씨의 6대조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씨가 수집한 여러 성씨들의 족보가 비장되어 오던 것을 함경남도 단천에 사는 최장환(崔章煥)씨가 강성우씨 집을 예방하여 최씨에 관한 부분을 필사하였던 것이다. > >그후 [[충청남도]] [[서산시|서산]]에 있는 최홍연(崔弘淵)씨가 서울의 여러 종친과 상의하고 지난 1937년에 경주최씨상계보라 하여 발간하였다. 이것을 또 1949년에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에서 중간(重刊)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 >그러나 성씨별로 성자(姓字)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시대인 신라 건국 초부터 성명의 자(字) 또는 계대를 어떻게 고증하였는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상계보에 본관별 최씨의 계대를 이어 거의 모든 최씨가 경주 최씨 상계의 어딘가에서 분적되었음을 상세히 계도화(系圖化)하여 수록하여 놓았다. > >그러나 여기(전주최씨연원지)에서는 상계보를 확실한 고증으로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예로 하여금 혼돈을 막기 위하여 신라 말기에 해당되는 계대 이하는 삭제키로 하였다. > >상계보란 당시 학자이며 야사가(野史家)였던 율계 강필동 선생이 증보(增補)한 자신의 작품이 아닌가 사료되며, 다만 선계에 대한 정통성 문제 이전에 후예로 하여금 참고하기 바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